Page 84 - 농촌진흥 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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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혁신 60년, 국민행복 100년
1968년에는 벼 집단재배 시범사업을 도입하고 증산요원을 집중투입했다. 토질
이 비슷한 지역에서 품종과 재배법을 통일시키고 공동작업을 펼쳤다. 농가가 협
력해 농사를 지은 결과 개별재배를 할 때보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집단
재배 시범사업은 쌀 증수 효과 외에도 신품종을 신속히 확대 보급하는 데 유리
한 점이 많았으며, 이후 벼농사 기계화를 앞당기는 데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
로 평가된다.
쌀 자급의 기틀 마련 및 녹색혁명(1971~1980년)
02 녹색혁명 실현한 ‘통일벼’
우리 농촌을 보릿고개에서 구출해줄 새로운 벼 품종이 개발되었다. 세
계적인 미작연구기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협조를 받아 우리나라 육종팀
이 필리핀을 오가며 벼 품종 육성에 매달린 결과, 1969년 IR-667 통일벼 품종의
개발에 성공했다. 1971년 농촌진흥청은 이 중 가장 생산성이 높은 수원213-1호
를 대상으로 통일벼 시험재배 첫 도전에 나섰다. 5ha 규모의 시범재배단지를 조
성했는데, 전국의 550개소, 8,451농가가 참여했다. 이 해 많은 비가 내리는 바람
에 상당수의 벼 포기가 침수되었음에도 당시 10a당 330kg 수준이던 쌀 수량이
시범단지에서는 평균 500kg을 상회했고, 통일벼 주곡자급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해 시험재배를 통해 농촌진흥청은 통일계 품종의 국내 재배
기술을 정립할 수 있었다.
통일벼가 경이적인 다수성 품종으로 평가되면서 1972년부터 일반농가에 보급
되었다. 그러나 재배에 참여한 농가들이 대 풍작의 기대에 부풀었던 것도 잠시,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인해 극심한 냉해가 닥쳤다. 지도공무원들이 왕겨를 태
워가며 온도를 높이느라 안간힘을 기울인 노력이 무상하게도, 이후 수해와 풍
해, 우박피해까지 잇따라 발생해 통일벼에 큰 타격을 입혔다. 농부들은 쭉정이
만 달린 벼를 손으로 훑으며 한해 농사를 망쳤다고 한탄했고, 일부 재배농가에
서는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통일계 품종을 권장하며 지도에 적극 나섰
던 농촌지도원들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가을
막상 탈곡을 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쌀 소출이 있었다. 일반벼를 훌쩍 넘어서는
수확량이었다.
1973년 정부는 쌀 3,000만 석 돌파작전을 국정 목표로 수립하고 식량증산정책
을 전 국민운동으로 전개했다. 아직 다수의 농가에서는 밥맛이 떨어진다는 이유
로 통일벼를 기피하고 있었고, 시험연구 단계 품종을 농가에 보급하는 것은 시
기상조라는 비판여론이 높았으나 통일계 볍씨 확대 보급이 강행되었다. 지도공
1972. ‘통일벼’ 시범재배단지 전경 무원들이 시범단지에 주재하다시피하며 현장지도에 나선 결과 통일벼 재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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