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2 - 농촌진흥 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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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혁신 60년, 국민행복 100년
바꿔놓았다. 농촌여성의 조직적 참여로 마을의 소규모 공사쯤은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77년에는 정부가 각 기관단체별로 육성하던 농민단체의
일원화를 기했고, 생활개선구락부가 새마을부녀회의 생활개선부로 통합되었다.
새마을부녀회의 분과조직 중 하나로 편입되면서 생활개선회는 고유의 활동 수행이
어려워졌다.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육성해온 4-H회도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1972. 생활개선구락부 지도자 연찬
밑거름 역할을 했다. 정신혁명운동의 추구뿐 아니라 농어촌 환경 개선 등 주요
현장활동에서의 유사성 때문에 농촌을 일깨우고 부흥시키는 일에 서로 협력
하면서 1972년에는 4-H구락부의 명칭을 새마을4-H구락부로 변경하기도 했다.
이어 1979년에는 한국4-H연맹의 명칭을 한국새마을청소년위원회로 변경했다.
한편 1970년대에는 농촌의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도시의 직업을 찾아 몰려
가면서 4-H회원 수가 1973년을 정점으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4-H
회는 회원 연령을 26세까지 높이는 등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노력했고, 이 시기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마을길 확장
4-H 회원들도 농촌 정착의 꿈을 놓지 않으며 농촌 부흥을 위한 역군으로 농촌을
지켰다.
농촌지도 인력·단체 조직 정비(1981~1990년)
03 농진회 설립
농진회(農振會)는 1983년에 처음 창립되었다. 1985년 서울시와 각도에
지회가 설치되었고, 1988년에는 여성지회가 설치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전국에 11개 지회를 운영하면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1987년에는
농촌진흥청장으로부터 사단법인 농진회 설립 허가를 획득했다. 농진회는 2011년
농진중앙회로 명칭을 변경했으며(지회는 농진회로 변경), 농촌진흥청(수원 소재
중부작물부)에 사무실을 두고 제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농진중앙회의 주요
재원은 회비로 운영된다.
농진중앙회는 당초 농촌진흥기관(농촌진흥청 및 소속 연구기관, 도 농업기술원,
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공무원들이 회원 상호 간 친목도모와
상부상조 관계 유지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재직 시 경험을 살려 농촌
진흥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도록 했다.
구성원들 대부분은 1970년대 우리 민족을 보릿고개에서 해방시킨 녹색혁명의
핵심 주체로, 2009년에는 이들의 축적된 경험과 전문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녹색기술 시니어자문단’을 발족시켰다. 녹색기술 시니어자문단
(녹색기술 실버자문단)은 소속된 전문가 중 적임자를 선정해 현직 담당 공무원과
농촌 현장 기술지원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푸른농촌 희망찾기 운동’ 현장 지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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