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남해화학 50년사
P. 66
남해화학 50년사
3%를 수출 대행 수수료로 지급해야 했는데, 이는 수출 마진을 고려할 때 적지 않
은 부담이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비료제품은 아그리코와 수출 대행 계약이 만료된 1988년부터 수출대금 회수
의 안정성 등을 감안하여 국내 종합상사를 이용한 수출방법을 택했으며, 1996년부
터 일부 물량에 한해 직수출을 시작했다. 화학제품도 비료와 마찬가지로 종합상사
의 수출 창구를 이용해왔으나, 1992년부터는 일부 화학제품을 직수출하면서 종합
상사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연간 수출 1977년 세계시장에 화학비료를 첫 수출한 이래 3년 만인 1980년에는 1억 달러 수
02
1억 달러 돌파 출 기록을 달성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국제 원자재가격이 급상승
하며 1980년 DAP, Urea 등 비료 가격이 크게 인상된 것이 수출 1억 달러 달성에 일
조했다. 이 해 남해화학은 이란, 튀르키예 등에 DAP를 대량 수출하는 한편, 중국,
베트남 등 공산권에까지 수출시장의 빗장을 여는 성과를 거양함으로써 DAP 42만
4,000톤, 요소 10만 2,000톤 등 총 52만 6,000톤을 수출하고 1억 3,400만 불에 달하
는 외화를 획득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수출 실적이 미미하던 때였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세계적
인 경기침체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수출 1억 달러 첫 달성이 갖는 의미가 더욱 각별
했다. 남해화학은 그해 11월 30일 제17회 수출의 날에 국가 수출정책에 기여한 공
로로 국내 비료업체로는 최초의 1억 불 수출 탑을 수상함으로써 더 넓은 해외시장
으로의 진출을 위한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남해화학은 1983년에도 창립 이래 최대 물량인 53만 톤을 수출하여 또 한 차례 1억
불 달성에 성공했다. 이번에도 수출 여건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1981년 소련
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1980년대 들어 미국은 대소 곡물 금수조치를 단행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상이변으로 인해 미국 내 비료 재고가 누증되어 국
제 비료 가격이 급락했다. 이 영향으로 남해화학의 수출단가는 변동비선에도 미치
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응해 남해화학은 천연가스로 생산되는 값싼 암
모니아를 원자재로 수입하고, 일본으로부터 저가의 황산을 수입했다. 아그리코와
도 수출대행계약을 조정하여 수수료율을 인하시켰다. 또한 공정을 개선하고 에너
지를 절감하며 각종 부대비용과 간접비용을 줄임으로써 비료제품의 원단위를 낮
추었다. 이를 통해 변동비를 상회하는 선에서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고 수출에 활
보를 보이게 됐다. 이런 노력으로 1983년 창립 이래 최대 물량 수출과 함께 1,500만
1980.12. 제17회 수출의날 트로피 불의 외화를 획득하는 개가를 일궈냈다.
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