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남해화학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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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화학 50년사
희질산공장 전경 입상초안공장 전경
입 대체시켰다.
1980년대 들어 질산은 당초 예상보다 저조한 수요 증가로 저율 가동이 불가피했
다. 1988년부터 건설 붐을 탄 산업용 화약 생산이 증가하고 DNT공장의 가동 등
이 겹쳐 이듬해에는 일시적인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화
학공업이 활성화되면서 질산의 수요가 증가하자 1988년에는 희질산공장의 생산
능력을 연산 10만 톤으로 확장하였고, 농질산도 1989년 연산 7만 톤 규모 제2농질
산공장을 추가로 건설하여 총 생산 능력을 연산 10만 3,000톤으로 높였다. 질산은
1980년대까지 남해화학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급하였으며, 질산 생산이 경쟁체
제로 들어간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초안공장(1기)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 선언의 배경 중 하나는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
이었다. 1970년대에 발생한 인도차이나반도 사태 등으로 국가안보의 긴장감이 높
아지면서, 정부는 1980년까지 자주국방 태세를 완비한다는 목표로 방위산업 육성
에 박차를 가했다. 1974년에 우리나라 공업용 초안의 수요는 8,300톤 정도였고 전
량을 수입에 의존했다. 향후에도 매년 10%의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판단
되었으며, 그 경우 1980년 연간 수요가 1만 5,000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남해화
학은 1980년에도 초안의 전량 공급이 가능하도록 추정치를 반영하였고, 하루 50톤,
연산 1만 5,000톤 규모의 초안공장(입상초안공장) 1기를 건설했다. 미국의 케미코
가 설계와 시공을 맡았고, 1977년 5월 시운전을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18일 성능 보
장을 완료했다. 남해화학이 초안공장을 건설하여 독점 생산하면서 우리나라는 자
체 화약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초안을 수입 대체로 전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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