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농촌진흥 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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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 농촌진흥사업
1970년대 한우 비육지도
구분 주요 내용
인공유에 의한 한우 조기육성 시범사업은 1976~1977년에 송아지를 입식
(1976년 414두, 1977년 828두), 인공유 급여기술 등을 집중지도했으며, 6개
인공유 육성
월령에 기존 평균치보다 증체를 가져왔다. 인공유의 효과와 송아지 육성의 새
기술을 농민에게 인식시킴으로써 인공유 사육농가가 크게 늘어났다.
한우 육성비육 기술지도는 1976년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61개 마을에
육성 비육 마을당 30두 기준으로 수송아지 4,600두를 입식해 인공유에 의한 육성비육
기술을 지도했고 증체를 보였다.
큰소 비육은 1976년 25개 초식가축 시범마을에 250~300kg 정도 큰소를 입
큰소 비육 식(1976년 1,000두, 1977년 1,300두), 3~5개월간 단기비육을 시켰다. 그 결
과 일당증체량이 늘고 소고기 증산과 더불어 농사 소득 증대에 기여했다.
국내 부존자원을 사료로
1970년대 들어 석유파동과 식량파동이 세계를 휩쓸면서 값비싼 해외사료의 의
존도가 높은 우리 축산업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 사료가격 상승에 따라 옥수수
톤당 수입가격이 폭등해 양계 사육에 타격을 주었으며, 다음으로 양돈과 육우
사육에까지 그 여파가 닥쳤다.
농촌진흥청은 한우 숙사에서 벗어나 한우를 생사(生飼)하도록 하는 연시지도
시험사료 조제
에 주력했다. 생사란 사료를 삶아서 주지 않고 생으로 주는 것이다. 농업인들도
생사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1970년대에 풀사료 육종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초지면적이 매우 빈약하지만, 이를 대체할 논, 밭, 임야, 유휴지 등의 잠재적인
사료 생산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우 생사를 위한 조사료 확보방안으로 옥
수수 등의 사료작물을 재배하도록 시·군당 1개소씩 시범포를 설치했고, 농촌진
흥청이 사료 조제기술을 중점 지도해 축산농가가 사료 자급도를 높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료 난 해결에 힘을 보태기 위해 농촌진흥청은 수입사료를 대체할 국내 부존
자원을 찾아나섰다. 1975년부터 울릉도에 자생하는 ‘섬바디’를 사료화하기 위해
시범포를 설치 운영해보기도 했고, 1977년부터 고구마 주산단지를 중심으로 매
년 서강사료 생산시범포를 100개소씩 설치해 대체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자급사료 생산기술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며 위기 극복에 힘썼다.
축산 사양기술의 발전(1981~1990년)
03 증산에서 품질로 사양기술 변화
한우는 농가의 소득작목으로 1980년대 초까지 인기가 높았다. 1987년
이후에는 미국의 소고기시장 개방 압력이 점점 거세지며 국내시장 개방이 시간
문제로 다가오는 등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한우농가가 크게 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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