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제일감정평가법인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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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없는 낙관에는 대가가 따랐다. 40인 로스터 마감 직전까지 제일은
인적 구성을 완료하지 못해 속을 태웠다. 결국 실무에 투입될 젊은 감정
평가사 영입에 실패한 제일은 은퇴하거나 소속을 정하지 못한 원로 감
정평가사를 접촉해 간신히 최소 규정을 충족했다. 천신만고라는 말이
제일감정평가법인 50년사
과장이 아닌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법인이 출범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당시 40인
의 절반가량이 실무를 떠난 원로 그룹이었고, 40~50대 감정사 몇 명에
신규 감정평가사는 10명 내외에 불과한 조직 구성은 기형적이었다. 고령
화된 제일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는 소장 감정평가사도 적지
않았다.
업계의 지각변동에 대비해 한발 앞서 움직인 다른 법인에 인재를 빼앗기
면서 경쟁력이 떨어진 제일의 1990년대 초·중반은 암울했다. 기형적인 인
적 구성으로 점차 업무 수주도 줄어들면서 업계 순위도 밀려났다. 업계를
선도하던 제일이 하루아침에 업계의 바닥권까지 떨어지고야 말았다.
1990년대 중반 신입 감정평가사들이 업계를 평가할 때 ‘제일만 아니면
괜찮다’고 할 지경까지 제일의 위상은 끝 모르고 추락했다. 이는 1991년
감정평가법인 출범 당시 안일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회사가 정상궤도를 되찾기까지 7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기에
도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구성원들의 잦은 이탈로, 최소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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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원인 감정평가사 40명을 채우지 못해 건설부의 질책을 받고, 결원
을 충원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제일에게는 아픈 과
거이지만 무조건 잊기보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 아픔에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1991년 40인 감정평가법인 출범으로 질곡에 빠졌던 제일의 역사
유비무환 2007 는 2007년 우수감정평가법인 출범에서는 반면교사로 활용되었다. 실패
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제일의 집행부는 미래를
준비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2005년 12월 29일 정부는 감정평가업자의 신뢰도 향상을 위해 감정평
가사 자격 등록제도 도입, 감정평가법인의 회계구조 투명화, 부실감정
평가에 대한 제재 합리화, 감정평가사의 성실의무강화, 감정평가사 계
속 교육의 의무화를 골자로 「부동산공시법」을 개정했다. 그 후속조치로
2007년 6월 4일 건설교통부는 국내 대형 감정평가법인 가운데 제일을
포함한 13개 법인을 우수감정평가법인으로 지정했다.
우수감정평가법인의 요건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일정 최소주재 감
정평가사 및 최소잔류 감정평가사를 확보하고, 7개 이상의 분사무소를
50 Years History of JE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