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남해화학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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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편
국민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식량증산을 위한 비료산업의 뒷받
침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으로 비료 생산시설이 파괴돼 비료의
자체 공급이 불가능했다. 비료는 전후 식료품 다음의 원조 항목으로 지정돼 미 군
정으로부터 원조물자를 받았고, 우리나라가 수여받는 연간 원조자금 중에서 40%
에 달하는 액수가 비료 수입에 사용됐다. 비료 부족으로 인한 농업 생산성 감소가
국민 생활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정부가 비료산업 육성에 적극 나섰다. 정부가 화
제7비료공장 부지조성 예정지
학비료공장 건설을 주도하여 1955년 충주비료공장을 지었고 1958년 나주비료공
장이 출범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1960년대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화학비료 생산시대를 맞았다.
1960년 1비(충주비료), 1962년 2비(호남비료), 1967년에는 3비(영남화학), 4비(진
해화학), 5비(한국비료) 등 비료회사들이 속속 탄생했다. 대단위 비료공장의 준공
으로 총 비료생산도 100만 톤을 상회하며(115만 4,000톤) 화학비료의 자급자족을
실현했다. 1967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비료자급률은 38.4%에 머물렀으나 3, 4, 5비
가 준공 가동되면서 질소질비료(요소비료)가 자급단계에 도달했다. 1970년대 들
어서는 1973년 6비인 충주비료공장 내 암모니아센터 등이 건설됐다. 이 외에 경기
화학 풍농, 조선비료 등 민간주도 비료공장 건설도 활발해져 인산질비료(복합비
료)도 전량 자급하게 됐다.
1970년대는 우리 농업에 빛나는 이정표가 세워진 시기였다. 1971년 녹색혁명의 주
역으로 불리는 통일벼 품종이 개발돼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앞장서
식량증산 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통일벼가 농촌에 보급되고 농업인들이 시
비 방법 등 재배기술을 전수받으면서 쌀 생산량이 급속히 늘어났다. 마침내 1977
년에는 식량자급이라는 숙원사업을 달성하는 녹색혁명을 실현했다. 통일벼 등 다
비성 신품종의 개발 보급과 함께 재배 면적이 확대되고 농업인들의 시비가 늘어나
면서 1970년대에 비료 투입량이 급증했다.
1973년 8월에는 물량 부족으로 인해 비료파동이 발생해 농업인들이 고충을 겪었
다. 정부는 기존 6비 시설을 확장하는 것에 더해, 비료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새로
운 비료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고심했다. 1980년대에 가면 국내 수요는 물론 수
출을 포함하여 비료 수급량이 2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장기적인 포석으
로 대단위 공장인 7비를 신설하고 조기 가동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으로 결
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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