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3 - 남해화학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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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량을 다르게 배합해서 지역마다 다른 작물의 형태에 따라 생산해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배합 레시피를 일일이 작성하기도 힘들고, 제
                                                조사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제조법을 일일이 다르게 적용할 수 없었다. 남해화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오래가 18-8-8’ 등의 완효성비료 생산에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양질의 비료를                                   1977년 공장 준공과 함께 비료를 출하하기 시작한 남해화학은 규모와 생산물
              더 싸게 공급하는 판매정책                    량 면에서 선발 주자들을 앞지르며 내수비료 공급을 주도하는 위치로 부상했다. 남해화

                                                학은 회사 설립의 취지에 따라 내수비료 우선 공급 정책을 펼쳐 정부 방침에 부응했다.
                                                내수비료 공급 첫해인 1978년 요소 11만 5,000톤, 복비 36만 5,000톤을 공급하며 각각

                                                국내 총 소요량의 21%와 39%를 차지했다. 1979년 복비 국내 총 소요량의 53%를 공급
                                                했고 1983년부터 매년 약 80%의 물량을 공급했다. 요소도 점점 공급량이 늘어 1983년
                                                47%, 1984년부터 전체의 60% 이상을 공급했다. 남해화학은 정부가 비료사업을 직접

                                                관장했던 1987년까지 내수비료의 70% 이상을 공급해 안정적인 비료 수급을 주도했다.
                                                1988년 정부는 비료공급사업을 농협으로 이관했다. 경쟁입찰을 통해 공급 물량과 가격

                                                이 결정되는 자유판매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내수비료 안정을 위한 남해화학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남해화학은 내수비료 우선 공급 방침을 정하고, 농협 입찰에서 공급 물

                                                량과 가격을 주도함으로써 타사의 가격 인상을 억제했다. 1989년 남해화학은 국내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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