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수산가족 2023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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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종필 만화평론가
마음처방
둘
에리크 스베토프트 만화가의
『SPA』
“우리가 좀 심했다면 미안해요.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여기서는 늘 그래요. 모두에게 똑같이 그
래요. 빨리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일을 잘하지 못하는 직원에게 동료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런데 이 말에는 가슴 아픈 창
이 숨겨져 있다.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은 얼마든지 직장 동료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관행처럼 늘 그렇다는 말은 직장에 있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말을 들은 직장 동료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른 곳으로 이직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직장 상사는 말한다. 빨리 적응하라고. 적응하는 것만이 우리
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 어울
리는 분위기와 규칙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니 그렇다. 그러니 이럴 때는 어쩔 수 없다
는 말보다는, 퇴근 후 밥이나 한 끼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밥이 아니라면 술
이라도 한잔하자고 말을 건네는 것이 더 애정 있는 대화일 수 있다. 회사 일을 잘 적응하지
못하는 동료에게 시스템을 운운하며 강조하기보다는 그 친구의 입장과 사연에 귀담아 주
며 위로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에리크 스베토프트의 『SPA』이다.
가을에 읽으면 좋은 회복을 위한 책
정끝별 시인의 『모래는 뭐래』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
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을 억누르며 웃어넘기거나 누군가의 눈빛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를 악물며 버틸 때
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작은 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욕을 하고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가끔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
할 때도 많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삶일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관계 속에서 생을 버티는 것이다. 하
지만 그렇다 해서 쓰러질 필요는 없다.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실패할 권리가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정끝별 시인의
『모래는 뭐래』에 수록된 「디폴트값」의 한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