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Yuhan Now 2021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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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의 학문연구란 무수한 상대지식에
                                                    눈뜨는 기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교사의 가르침이나 교과서 내용, 참고서의 설명 등은
                                         전적으로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여러 가지 설명 중에 절대로 틀린 답과
                                                    절대로 합당한 정답으로 나누어지며
                                                        정답은 언제나 하나여야 한다.









            젊음은 과분하게 찬미되는 봄과 비슷하다. 그러나         선택이 타인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 그 선택에 대한       의 세계, 수없이 많은 정답과 정답이 지닌 모순에 대
            봄처럼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뿐인 생을 통해        책임은 대체로 타인의 몫이 된다. 대학의 학과 선택,     해 생각하는 곳이다. 대학은 지적 절대주의 대신 지
            그것은 단 한 시기 동안만 허용된다. 그래서 어떤 작      취업의 결정, 중매결혼 등의 경우에서 어느 정도 그      적 상대주의에 눈뜨는 곳이며 그런 점에서 교수는
            가는, 자기가 만약 신이었다면 젊음을 인생의 맨 끝       런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경      가르치는 사람이기보다 학생과 더불어 연구하는 사
            부분에 배치했을 것이라고도 말하고, 어떤 이는 “인       우에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된다. 따라서 자유       람, 우주처럼 넓고 큰 지식의 무한성과 함께 여행하
            간은 젊음을 일시적으로 소유한 뒤 나머지 시간은         는 선택이며,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주어지       는 사람이다.
            그것을 추억하는 것이다”라고 탄식한 바도 있다.         므로 다시 사르트르의 명제로 설명한다면 “자유는
                                               책임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학은 또 주체적 자아를 형성하는 곳이다. 역사와
            이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은 그토록 찬탄                                           사회에 대해 개인의 희망과 이상에 대해 정신의 구
            되는 젊은 시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문턱에 들         요컨대 대학생활의 자유는 선택에 의해 구현되고 그       걸을 하는 시기가 아니라 자립하고 독립하며, 비판
            어섰다. 게다가 지옥에 비유되는 입시의 고통스럽         선택의 책임은 본인의 몫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의 정신과 용기로 자신의 내적 욕구를 깊이 통찰하
            고 너절한 과정도 모두 벗어났다. 그 타율(他律)의       다. 대학생활은 자유와 선택과 책임에 대한 훈련의       고 관조하는 시기이다.
            긴 과정이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었다고 간단히 치         과정이며 그것에 대한 구체적 실천과 인식의 시대라
            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아온 것        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이 자유라는 것이 대학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젊은이의 꿈과 동경, 낭만
            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법에, 생각해야 할 방식의       이전과 대학생활을 어떻게 변화하게 하는가.           의 시대를 경험하는 것이리라. 그것이 비록 허황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                                          고 비현실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젊음을 황폐하게
            은 바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당사자들이다.            한마디로 고등학교까지는 절대지식을 교육했다면          하거나 삭막한 것으로 만드는 것에 비한다면 얼마
                                               대학에서의 학문연구란 무수한 상대지식에 눈뜨는         나 값진 인생의 투자일 것인가.
            도대체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결        기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교사의 가르침이나 교
            정에 따라 내가 움직이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과서 내용, 참고서의 설명 등은 전적으로 맞거나 틀      이러한 낭만적 체험과 사색이야말로 자신의 내부에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먼저 의미한         리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 여러 가지 설명 중에     도사리고 있는 낡고 진부한 관습을 파괴하는 방법
            다. 서클활동, 부전공, 수면시간, 독서행위, 교우 등     절대로 틀린 답과 절대로 합당한 정답으로 나누어        이며 기성세대가 타성적으로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
            등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전적으로 대학생 자신에         지며 정답은 언제나 하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고 저 견고한 세계적 질서를 부수고 젊은이가 새로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부모나 스승       는 현재 상태의 입시제도는 붕괴해 버리고 만다. 맞      태어나는 창조적 재생의 방법이기도 하다.
            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지         지 않으면 틀린다는 이 이치론(二値論)적 절대주의
            면서 부모나 스승은 조언자의 입장으로 물러선다.         교육은 고등학교 과정으로 종결된다.               창조를 위한 파괴의 시대, 최종적 긍정을 위한 끊임
            이때 본인에 의해 무엇이든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은                                          없는 부정과 비판의 시대, 그것이 곧 자기확립을 향
            선택의 권리야말로 자유를 의미한다는 뜻이 된다.         대학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가르치고 배운다’는 점       한 대학시대의 빛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것을 사르트르의 명제로 바꾼다면 “자유는 선택         에서는 그 이전의 과정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대학
            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은 이치론적 절대주의 대신에 무수한 지적 가능성                글 홍기삼 유한학원 이사장,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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